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79년 === 1379년 2월에는 전라도 순문사 정지가 순천과 현 전남 [[보성군]]인 조양(兆陽), 영광 등지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최영은 경복흥, 황상(黃裳) 등에게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해도, 재상들이란 작자들이 걱정도 안하고 있으니 무엇을 어쩌겠는가?"''' 하고 질타하기도 했다. 3월에는 왜구가 도강현(道康縣)을 공격했으며, 이후 [[남원]](南原)을 공격해서 판관을 살해하고 사흘간 머물다가 떠나 다시 순천을 공격했다. 4월에는 왜적이 안산군(安山郡)을 공격했으며, 연안부가 공격 당하자 나세 등은 전함 52척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가기도 했다. 합포에서는 왜구의 침공이 있어 우인열이 이에 맞서 싸워 막아내긴 했는데, 아군 사상자는 80여명이나 되는데 수급을 벤 적군은 4명 뿐이었다. 5월에는 보병 2천여명에 기병이 7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진주를 침략하자, 양백연이 우인열, 배극렴 등과 함께 나서 이를 무찌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다른 왜구들이 풍천(豊川)을 초토화시키면서 지주사(知州事) 유자(柳滋)와 안렴(按廉) 김간(金侃)을 살해하고 관아와 민가를 불사른 후 60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는 나세와 김유가 왜구와 수전을 벌였으며 신주(信州)가 공격 당했다. 영청현(永淸縣)에서는 주 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왜구와 싸워 이겼다. 또한 고려의 사신 한국주(韓國柱)가 [[규슈|구주]](九州)에 가서 왜적을 금할 것을 청하니 백제 [[성왕(백제)|성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휘하의 일본해도포착군관(日本海盜捕捉軍官) 박거사(朴居士)를 그의 군사 186명과 함께 고려로 보내 왜구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울주(蔚州)와 [[동경(고려)|계림부]](鷄林府)가 왜구에게 공격 당하자 박거사가 계림부에서 맞서 싸웠으나, 계림원수(雞林元帥) 하을지(河乙沚)가 지체하여 돕지 않자 박거사의 군대가 대패하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6월에는 청도군(淸道郡)을 공격한 왜구와 우인열이 맞서 싸웠고, 용주(龍州)와 의주(義州)를 침략한 왜구를 만호 장려(張侶)가 물리쳤으며, 울주ㆍ청도ㆍ밀성ㆍ자인(慈仁)ㆍ언양 등지도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우인열, 하을지, 배극렴이 맞서 싸워야 했다. 7월에는 왜구가 낙안군(樂安郡)을 쳤고, 현재의 [[울릉도]]인 무릉도(武陵島)에 왜구가 반 달간 머물다가 떠나기도 했다. 울주에서도 왜구가 머물며 곡식까지 거두어가서 완전히 탈탈 털어먹는 일이 있었다. 8월에는 왜구가 여미현(餘美縣)[* 충청남도 해미읍]을 쳤고, 이후 수주(隨州)와 곽주(郭州)를 공격했다. 사주(泗州)에서 우인열, 박수경, 배극렴, 오언이 왜구를 물리쳤다. 9월에는 단계(丹溪)ㆍ거창(居昌)ㆍ야로(冶爐)[* 모두 경상남도 지역] 등이 공격을 받아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적과 싸우다 패배해서 죽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